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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서지 않고 달려들다

“우리나라 세계맥주전문점 일등 브랜드 ‘와바’.
와바 스토리는 창업주 나이처럼 젊고, 브랜드 역사처럼 짧지만
그처럼 드라마틱하고, 참으로 역동적이다.”


오전, 본사에서_ 이마트보다 많은 세계맥주 판매량
세계맥주전문점 와바(wa-bar.co.kr) 본사로 가는 길, 신문 한 귀퉁이에 중국 상하이(上海) 야경(夜景) 논란 기사가 실렸다. 전력난 속에서 ‘전기 먹는 하마’ 야간 조명이 눈총을 받고 있다는 것. 하지만 멋진 야경으로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이 연간 수억 달러에 이르니 불을 끌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는 것이다. 이효복(1967년생) 사장을 만나 중국 얘기부터 꺼냈다. 지난해 와바는 국내 가맹점 100호점을 돌파하고 중국에 진출해 상하이점(상해시) 2개점, 이우점(산동성) 1개점, 청도점(절강성) 1개점 등 모두 4개점을 개설했다.
“중국 와바는 평균 3억원이 투자됐는데, 비교적 짧은 기간에 투자비를 회수할 만큼 장사가 잘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2~3년은 투자 단계로, 수익보다는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 데 힘쓰려 합니다. 제일 큰 어려움은 지사가 없어 관리가 어렵다는 겁니다. 올해 안에 지사를 세울 계획입니다. 이우점이 전력에 문제가 있어요. 밤이 되면 간판, 에어컨, 가로등이 다 꺼집니다. 경쟁 점포들도 다 같은 조건이니 상관 없다고 여겼는데, 밤 문화 자체가 사라지더군요.”
중국 벌판에 와바 깃발을 꽂을 때, 이효복 사장의 가슴은 사뭇 뭉클했겠지 싶다. 쫄딱 망해 지옥 같은 한때를 보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지 않았을까. 6월 현재 국내에 개설된 와바는 128개점(2000년 가맹사업 이후 폐점한 가맹점은 4개), 7개점이 개점을 앞두고 있다. 올해 안에 150개점은 훌쩍 넘길 듯. 앞으로 국내 가맹점 목표는 300여 개다. 생맥주가 단연 강세를 보이는 국내 맥주시장에서 와바의 선전은 제법 눈부시다. 요즘 수입맥주가 200여 종에 달하는 등 세계맥주가 많이 대중화됐다고 하더라도. 와바의 세계맥주 소비량은 이마트보다도 많다. 단일 브랜드로 국내 최고다.
“2억5천은 있어야 와바를 엽니다(35~40평 점포). 최근 예비창업자들은 정말 신중합니다. 가맹점을 스무 군데나 돌아보기도 합니다. 개설신청 후 계약하는 기간이 예전보다 훨씬 오래 걸려요. 개설신청비(서울 100만원, 지방 500만원)를 걸어야 본사에서 개설 준비작업에 들어갑니다. 개설신청비는, 개설이 안 되면 돌려줍니다.”
이효복 사장의 인터뷰 태도는 한결같았다. 두서없는 물음에도 시종 진지하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경쾌하게 응했다. 일순(一瞬) 울걱 눈물 머금기도 했지만···

이동, 차 안에서_ 사람 하나하나가 너무너무 중요하다
“이제 수도권에서 지방도시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생각입니다. 점포비용이 서울의 1/2~1/3 정도라 승산이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에는 ‘공동투자’ 방식의 대형 점포를 열 계획입니다. 혼자 2억, 3억 들여서 작은 가게를 하는 것보다 5억, 6억 돈을 모아서 큰 가게를 운영하고 나누는 게 수익이 더 나아요.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대형 점포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이효복 사장은 본사 인원을 20명 선에서 묶을 생각이다. “인테리어는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할 수밖에 없는데, 프랜차이즈는 일당백(一當百)이 가능하다”고 했다. “일본에는 네 명이 600개 점포를 관리하는 ‘이자카야’도 있다”면서, “일곱 명으로 운영하기가 벅차서 그 두 배인 열네 명이 하고 있지만, 일곱 명이 베스트로 하고 봉급을 두 배 가져가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덧붙였다. 생각해 볼 만한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이 경우 직원 한 명, 한 명이 정말 중요하다. 인성보다 능력 본위다. 그는 “아무리 성실해도 능력이 안 따라주는 사람을 볼 때가 진짜 곤란하고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4월,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마련한 와바 점주 포럼 때, 이사장은 시쳇말로 충격을 먹었다. 고작 34명만 온 것이다. 그즈음 어느 주류 프랜차이즈 회사 포럼에 350여 명의 점주가 몰려든 걸 직접 본 그로서는 멍했을 것이다. 본사의 힘이 이런 것이로구나···. 후일 업계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20%만 참석해도 성공’이라며 위무했다지만, 그는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자꾸 포럼 얘기를 했다. 결국은 교육 문제였다. 프랜차이즈는 교육사업이다.
“점주 교육은 영원한 숙제 같아요. 처음부터 대박집이 특히 문제입니다. 장사가 잘되면, 자신이 서울대 나온 양, 베스트 드라이버인 양 행동합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장사가 안되면 기댈 거면서. 직원이든 아르바이트든, 가맹점이 3일 전에 신청만 하면 본사에서 3일 과정(11개 과목) 교육을 제공하는데, 활용을 잘 안 하세요. 입 벌리세요, 씹어 드세요! 하고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지···. 지난 연말에 세계맥주 정보를 담은 ‘맥주 가이드북’을 만들어 권당 500원씩 가맹점에 제공했는데, 아직 재구매하겠다는 데가 없습니다. 제작비 절반도 안 되는 값인데···. 가이드북을 많이 뿌리면 뿌릴수록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텐데 말입니다.”

점심, 식당에서_ 도망가지 않고 달려들다
이효복 사장은 전기공학을 했다. 휴학하고 방위 복무를 하던 그는, 휴일이면 남대문 새벽 인력시장에서 ‘노가다’를 뛰었다. 집안 형편은 어렵지 않았지만, 다 큰 놈이 손 벌리기 뭐해 그랬다. 복학 전에는 남대문시장 옷가게 점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장 매점에서 점포마다 인터폰을 달아주고 주문 배달을 했는데, 옷 먼지 탓으로 목이 칼칼해 인터폰을 해봐도 탄산음료뿐 물은 없었다. 옳거니, 그는 시장 상인에게 생수를 얼려서 팔았다. 보리차 끓여 먹던 시절, 생수가 생소하던 때였다. 이후 그는 줄곧 신종 업종을 개척한다.
취업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는지 1992년, 그는 창업했다. 소주방, 포켓볼 당구장, 비디오방, 도서대여점을 연달아 열었다. 모두 새로운 업종들, 국내 초창기 아이템이었다. 모두 죽은 점포 살리기, 치고 빠지기였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점포를 직접 인테리어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지역 상인회 총무 일을 도맡은 탓에 상인 모임은 그의 가게 차지였다. 그의 가게를 본 상인들이 물었다. 인테리어, 누가 했어? 그는 그들에게 인테리어 조언을 하고, 업체 소개를 하고, 감리를 맡게 되더니, 이윽고 공사 수주까지 따게 됐다.
처음 맡은 노래방 공사에서 700만원을 밑졌다. 공과잡비 개념도 몰랐고, 무턱대고 맘에 드는 자재를 쓴 탓이다.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게 싫었던 그는, 자신의 비디오방 중 가장 큰 룸에 인테리어 사무실을 차리고 까진 돈을 만회하자 했다. 투잡스를 본격적으로 벌인 것이다. 웨스턴 바까지 직접 열고 ‘풀 배팅’ 했는데, 거기서 망가졌다. 인테리어 사업은 그런대로 됐으나 바 영업이 꽝이었다. 그때까지 모은 돈을 다 날렸다.
98년 외환위기 이후 콜라텍 반짝 붐을 타고 다시 그는 돈을 만진다. 콜라텍은 그에게 신대륙 발견과 같았다. 인천 시의원이던 처가 식구의 단속반에 슬쩍 끼어 콜라텍 ‘시설 구경’을 간 그는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 열악하고 조악한 시설이건만 만원이었다. 正(바를 정)자로 기록된 장부를 들춰 보니 하루 입장객이 2,000명도 넘었다. 그는 콜라텍 인테리어를 하나 따냈다. 법률 검토 끝에 ‘공연장’으로 신고하게 하고 공사를 해줬는데, 그게 돈줄이 됐다. 콜라텍은 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조명, 무대, 음료··· 콜라텍은 일반음식점도 유흥음식점도 아니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걸자고만 하면 다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인근 콜라텍은 모두 영업정지를 당했지만, 그가 공연장으로 만든 곳만은 끄떡없었다. 그리고, 전화에 불났다. 콜라텍 일을 줄줄이 따냈다.
그 자신 직접 콜라텍을 열기까지 했다. 그런데 상황이 돌변했다. 우후죽순 콜라텍이 생겨나 업소 매출이 떨어지자 업주들이 인테리어 잔금 결제를 미뤘다. 한 집 공사를 끝내야 잔금을 받고, 잔금을 받아 다른 집 공사를 돌리고 했는데 돈이 막혔다. 선금과 중도금만으로 돌려 막기에는 역부족. 더군다나 콜라텍 업주는 대개 건달이었다. 돈 받기는커녕 만나기도 어려웠다. 음향 트집을 잡았다. 방음을 못 잡아 민원이 들어온다며 막무가내였다. 집 팔고, 처자식 처갓집 보내고 악전고투했건만 도리가 없었다. 자재상과 목수들은 돈 달라 아우성치고···.

저녁, 와바에서_ 맥주신도들은 맥주신전에서 경배(傾杯)한다
“콜라텍 마지막 공사지는 부산이었어요. 직원들은 하나, 둘 다들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형, 동생 하던 애들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앞으로는 이러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끝으로 떠나는 애에게 마지막 돈 2만원을 털어주니까, 울더군요. 그때 떠났던 친구들 대부분은 다시 왔어요! 지금 와바에 함께 있습니다.”
한여름 바닷가는 사막이었다. 여관비가 밀려 노트북까지 잡혔다. 새벽 거리를 배회했다. 교회 앞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이효복 사장은 교회로 들어섰다.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새벽기도 시간, 얼결에 거기 묻혀 기도를 하니, 뭔가 울컥 올라왔다. 그길로 부산 콜라텍 사장 아버지를 찾아가 매달렸다. 잔금을 당겨 주시면 공사를 끝마칠 수 있겠습니다. 뜻밖에, 고위 경찰인 아버지는 차용증을 받고 돈을 내줬다. 이사장은 혼자 두 달 더 부산에 남아 아르바이트 세 탕을 뛰어 그 돈 다 갚고 서울로 향했다.
일이 풀리려나, 음향시설 업자가 신용보증기금 팀장을 소개시켜줘 창업지원자금을 탔다. 네 명이 심사받았는데, 처갓집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는 와중에 누락, 말소되어 주거불명자였던 그가, 서류상 최악 조건인 그가 5,000만원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걸 종잣돈 삼아 보증금 300에 월세 20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사무실 앞에 1층 칼국수집, 2층 용봉탕집이 있었다. 저 자리면 맥주 바가 잘될 텐데···. 그는 그 집을 웨스턴 바 ‘텍사스’로 바꾸게 해 대박을 터뜨렸다. 99년이다. 텍사스 주인은 지인(知人)들의 업종전환을 부추겨 그에게 텍사스 인테리어를 많이도 떠안겼다. 다시 난리가 났다.
그러나, 역시 찔금찔금 들어오는 잔금이 문제였다. 실장님, 이실장, 자네··· 그를 부르는 호칭도 변했다. 약 오르고 화가 났다. 콜라텍 악몽이 떠올랐다. 공사대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또 떼먹혔다. 인테리어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다. 내 브랜드가 필요하다, 그게 낫겠다, 잔금 안 주면 확 간판을 내릴 수 있는. 자신의 브랜드가 절실하다고 생각한 이사장은 맥주바 프랜차이즈를 결단했다. 호프집과 고급 바 중간 형태의 대중적인 바 와바는 먹혀들었다. 6개월 사이 열 개를 열었다. 결코 운이 아니다. 그간 쌓은 공력(功力) 덕이다. 짧지 않은 경험은 무시 못한다.

“지금 자리에 오게 하시려 단련시켰구나 해요. 위기 때마다 좋은 사람들 만난 건 운입니다. 지금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것도 성장통(成長痛)이려니 해요. 가맹점주에 대한 생각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점주들이 어떤 요구를 해도,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다 했지만, 문제가 있는 점주 때문에 선의의 피해자(다른 점주)가 나오니까요. 이제는 아니에요. 3년 계약 후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데, 못 따라오는 점주는 정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천안에 여섯 개 점이 있는데, 네 개가 있을 때 5호점을 낸다고 하니까, 점주 네 사람이 담합을 하더라구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겁니다. 천안 인구가 50만입니다. 천안에서 이미 명품 브랜드로 자리잡은 와바는 한 개당 5~6만 인구는 커버할 수 있어요. 스타벅스를 보세요, 삼성역에서 역삼역까지 여덟 개가 있습니다. 다 잘돼요.”
그는 “가맹비가 원죄 같다”고 한다. “가맹비 냈다고 무리한 요구를 할 때면 아주 난감하다” 했다. 이제 우리도 가맹본부와 가맹점의 눈높이를 맞추자. 언제 CF 할 거냐고 만날 본사에 따지는 점주가 있는데, 본사에서 반반 대고 하자 하면 돈 낼 거냐? 이사장은 아니!라고 했다.

이효복 사장은 그것이 사무친 모양이다. 망해서 직원들이 뿔뿔이 ‘찢어진’ 추억. “망하지 않는 것이 성공”이라 했다. “본사 인원은 콤팩트하게 가져갈 것”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막말로 “더 이상 가맹점 개설이 안 돼도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도록” 말이다.



月刊<창업&프랜차이즈> www.biz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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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띠 2007.08.13 03:46

    창원에도 와바가 있는데..막상 내 주위에 있는 프렌차이즈 성공사례를 보니 더더욱 느낌이 많이 오네요.

    저도 화이팅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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